Posted by 김수민
사과문:
1. 방송 가운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는 이슬람 문화권으로 헝가리 서부가 거론되었는데, 서부가 아니라 중부임을 알립니다.
 
2. 방송에서 '무지카시'가 여러번 '무자카시'로 발음되었습니다. 철자를 읽으면서, 해당 언어의 발음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벌어진 실수입니다. 사과드립니다.

3. 월드뮤직을 공부하는 동시에 방송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관계로 벌어진 일들입니다. 앞으로 좀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김수민

쿠바 혁명은 음악시스템을 바꾸었다. 나이트클럽이 아닌 국가 정책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특히 '트로바의 집'을 통해 노에바 트로바가 등자한다.
트로바란 과히라, 과라차, 푼토, 볼레로 등 국제적인 음악 형식을 포괄하고
유럽의 오페라를 수용하여 형성되었다.
한두명의 가수와 기타, 클라베로 반주하는 트리오 형태였는데, 쿠바 민요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댄스 음악 대중화 이후 트로바는 쇠퇴했지만, 로컬 음악으로 존재하던 걸 정부가 재발굴한 것이다. 

카를로스 푸에블라는 1950년대 중반 로스 트라디씨오날레스 라는 그룹 이끌며 쿠바 혁명의 음악 대표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실비로 로드리게스, 파브로 밀라네스가 등장하여 사회주의 메시지 결합하였다.
누에바 트로바는 누에바 칸시온과 교학상장의 관계에 있는데, 누에바 칸시온은 독재정권 저항하는 음악이었다면
누에바 트로바는 혁명정권의 직간접적 후원 아래서 발전한 음악이었다.
누에바 트로바는 단순한 관제 기성세대의 음악이 아니다. 후안 카를로스 포르멜 같은 젊은 음악인도 있다. 

한편 쿠바에서 뉴욕으로 1940년대 이주한 음악인들이 미국 재즈 뮤지션과 함께하며
아프로쿠반 재즈가 발전했다. 혁명 이후에도 재즈는 있었다. 국립예술학교의 정규과목에도 삽입되었다.
쿠바에서는 혁명 이후 뉴 쿠반 재즈 탄생한 셈이다. 이라케레가 뉴 쿠반 재즈의 대표적 밴드다.
이들은 라틴 재즈, 비밥, 쿠바 민속음악을 전염성 강한 리듬에 결합시켰다. 바타 드럼 사용하여 손 바타, 바타 룸바로 불리웠다. 이라케레는 미국 민주당 카터 행정부 시절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피아니스트 곤살로 루발카바 가 등장해 뉴 쿠반 재즈에 동참했는데, 그는 1993년 미국 망명하고 말았다.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서 쿠바 뮤지션들은 연주할 기회를 가졌다. 로스 반 반이 대표적이다. 로스 반 반은 공산주의 밴드로 찍혀 1999년 어렵게 마이애미에서 공연을 가졌다. 1969년 결성한 이들은 오랜 기간동안 끊이지 않고 활동함으로써
쿠바의 롤링 스톤스가 되었다. 그들의 장르는 송고로, 손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손을 혁신한 것이다.
아프로쿠반은 물론 다른 캐러비안의 리듬을 수용했다.

로스 반 반을 기점으로 새로운 세대의 음악은 팀바로 발전했다. NG 라 반다가 대표적 그룹이다. 리더인 호세 루이스 코르테스는 다름아닌 이카케레의 전 멤버. 팀바는 쿠바 음악보다 정열적이고 광적이며, 손이나 송고보다 즉흥성 더 강하다. 거리의 댄스 음악으로 하이퍼 살사라고도 한다.

이후 룸바를 록 사운드에 접목한 신테시스, 전통적 손에 가까운 시에라 마에스트라, 모던 손의 쿠바니스모 등
제3세대 음악인들도 출현하였다. 한편 룸바는 뉴욕에 상륙해 살사가 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음악이 혼합된 쿠바 음악이 미국 음악과 혼합한, '혼합의 혼합'을 이룬 셈이다. 

Posted by 김수민

현재의 쿠바 음악은 팝에 흡수된 라틴음악과 달리 월드 뮤직에 속한다. 쿠바 음악은 우리에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룹을 통해서 단손, 볼레로, 손 등의 장르를 알 수도 있다.

1762년 영국이 쿠바를 침공해 스페인이 자유무역제한을 철회하였고, 1804년에는 아이티에서 흑인노예의 봉기가 성공하여
프랑스계 스페인계 농장 소유주들이 쿠바로 도망쳤다. 이것이 쿠바에 유럽문화가 전파된 배경이다. 한편 18세기 후반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가 증가하면서 아프리카인 노예가 수입이 되었고 아프리카문화도 자연스레 유입된다.
그리고 어느덧 스페인 식민주의가 쇠퇴하고 아프리카 노예들이 봉기하면서 1866년 노예제는 최종폐지되었다.
그런데 스페인 식민 정권은 노예제 시행 당시에도, 흑인 노예들을 민족별로 분류해서 카빌도(평의회)를 결성할 자유를 주었다.
카빌도의 양대 산맥으로는 루쿠미와 콩고가 있다. 루쿠미는 현 나이지리아에 거주하는 요룹자신들이 섬기는 오리샤 신을 가톨릭 성인과 연관지으면서 아프로쿠바인으로서의 신앙 체계, 이른바 산테리아를 만든다. 산테리아의 종교의례에는 바타 드럼이라는 북의 위상이 높다.
한편 콩고쪽은 룸바를 만들었다. 콩고 카빌도는 중부 아프리카 출신의 후예들로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유카 드럼을 썼고, 골반을 흔드는 바쿠아노 춤을 췄다. 룸바는 현대에 들어 쿠바의 서부 지역, 특히 마탄사스에서 발전했다. 룸바의 대표적 그룹의 이름도 로스 무네키토스 데 마탄사스.

쿠바 음악 가운데 단손은 라운지 스타일의 댄스 음악으로, 템포가 느려 천천히 춤추기에 좋다. 아이티 혁명으로 쫓겨온 프랑스계가 전파한 아바네라가 대중화된 것이기에 유럽적 기원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오르케스타 티파카스라는 브라스 악단에 의해 연주되었고 나중에는 브라스가 약화되면서 차랑가라는 악단으로 변모한다. 차랑가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클라리넷, 플루트, 베이스, 드럼, 기로&팀발레 등 퍼쿠션으로 이뤄졌고, 피아노 멜로디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볼레로는 쿠바 산티아고에서 발생한 느린 템포의 발라드이다. 베니 모레의 활약을 통해 194, 50년대 아메리카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멕시코 뮤지션인 트리오 로스 판초스, 루이스 미겔 등이 명맥을 이어갔다.
 
'손'에서도 볼레로를 전파한 베니 모레의 공헌이 지대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El Manisero(땅콩장수)>라는 곡으로
 인기를 끌었고, 1953년 쿠바 귀환 이후 '리듬의 야만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손은 쿠바 동부 오리엔테 주 산악지대 탄생한 음악으로. 아프리카 어법에 기초해 최초의 전국적 음악이 된 사례다. 손 밴드는 6인조에서 7인조로 변화해 나갔고, 기타, 베이스,
트레스(9현악기), 트럼펫에, 봉고, 마라카스, 클라베 등 타악기 추가되었다. 손은 소네로라고 불리는 리드 보컬이 즉흥 노래한 뒤 합창이 나오는 형식을 띠고 있다. 소네로 멜로디는 스페인 멜로디의 영향을 받았고, 리듬 패턴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가 콩가를 도입하면서 손은 아프리카화가 되었고 연주에도 즉흥 부분 삽입되었다.
 


 

Posted by 김수민
20세기 아일랜드의 역사는 곧 영국으로부터의 국가독립을 위한 투쟁이었다.음악적으로도 아이리시 포크 리바이벌이 대두되었다. 아일랜드 전통음악의 부활은 미국에 건너가 있던 아일랜드 뮤지션들 사이에서 먼저 본격화되었다. 1950년대 활동한 메리 오하라와 클랜시 브라더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메리 오하라는 1956년 결혼을 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아일랜드 민요집 등을 발표했다. 클랜시 브라더스 역시 1950년대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포크 공동체에서 연주하였고 컬러비아 레코드에서 유수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중에서 아이리시 뮤직의 이름을 떨쳤던 이들의 음악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리바이벌이라기보다 상업화된 전통음악이라는 한계 역시 지니고 있었다.

아이리시 모던 포크의 진정한 선도자는 숀 오리아다가 결성한 케올토이리 쿠알란이라는 그룹이다. 팝의 상업성을 지양하고 기악 위주의 악곡을 펼치면서 지그나 릴과 같은 켈트 민속댄스리듬을 되살렸으면서도, 민속음악을 모던하게 탈바꿈시키는 공헌을 남겼다.

케올토이리 쿠알란 출신의 패디 몰로니가 리더로 있는 치프턴스가 바로 이러한 흐름을 계승하고 국제화한 장본인이다.숀 오리아다도 한때 치프턴스에 재직했었다.1975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Barry Lyndon>의 사운드트랙에 곡을 수록한 이후 다작을 내면서 대중성과 비평가들의 상찬을 동시에 얻어낸 치프턴스는 그래미 시상식에서도 월드뮤직 앨범, 전통 민속 레코딩 부문에서 자주 수상하였다.

치프턴스는 2006년 <TheWide World Over: A 40 Year Celebration>을 발매하는데, 여러 유명 아티스트들의 피처링으로 자신들의 유명곡을 재녹음하였다. 참여 아티스트들을 살짝만 훑어 보자면 시네이드 오코너, 밴 모리슨, 코어스 등 아일랜드 뮤지션들은 물론 아트 가펑클, 롤링 스톤스, 스팅, 엘비스 코스텔로 등 굉장히 화려한 면면을 엿볼 수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멕시코계 미국인 밴드인 로스 로보스도 있다는 것이다. 

치프턴스 이외에도 기타 연주자인 도널 루니, 그와 파트너로 활동한 작곡가 크리스티 무어 등이 현대 아일랜드의 걸출한 뮤지션으로 꼽힌다. 한편, 도널 루니와 함께 활동하다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믹 몰로니는 미국에서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이리시 트래디셔널 이후 아이리시 컨템퍼리가 형성된 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아티스트로는 메리 블랙과 프랜시스 블랙 자매가 있다. 밴드 형태-아일랜드에서는 클랜이라고 하는데-로 활동하는 대표주자는 클래내드가 있다. 이들은 전통음악과 팝음악에 걸쳐져 있는 밴드다. 엔야가 보컬리스트를 맡던 시절 U2의 보노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이를 월드뮤직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한번 들어보자.

아이리시 뮤직은 록음악에서는 켈틱 록으로 이어졌는데, 전통악기와 현대 사운드의 접목을 꾀한 호슬립스가 그것을 대변했다. 펑크록과 아일랜드 포크를 크로스오버한 포그스도 주목할 만하다. 켈틱 음악은 아일랜드 바깥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에이레섬의 스페인 북서부 갈라씨아 지방에서 특히 그렇다. 얀 데 쿠벨처럼 전통음악을 순수히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파이프계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불리우는 카를로스 루네스 같이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개척하는 경우도 있다.
Posted by 김수민
월드뮤직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전통대중음악(포크, 블루스, 컨트리)가 아니고, 물론 영미 팝음악의 어법을 따르지 않으며, 록과 팝이 지역색을 띠고 나타난 것이 아니면서, 전통음악의 인위적으로 보존이 아닌 음악이다. 출처: Roy Shuker <Key Concept in Popular Music>.

오늘은 그 월드뮤직 첫 편으로 아일랜드를 소개한다.

지금도 아일랜드 펍에는 민요를 연주하는 그룹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일랜드 바깥에서도 아이리쉬가 많이 사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도 켈트 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다. 그룹 치프턴스는 브르타뉴 지방의 켈틱 음악을 연주해 <켈틱 웨딩>이라는 음반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아일랜드에는 신화와 전설 등 구비문학적 전통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에스노뮤지컬러지(민족음악학)에서는 켈틱 뮤직을 인도 음악과 비교하기도 한다. 여하튼 상대적으로는 동양적인 음악임이 분명하다.

켈트족은 유럽을 주름잡았지만 기원전 2세기경부터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현재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브리튼섬에서 동거 중이며, 북아일랜드와 독립국인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다.  

아일랜드 전통음악은 18세기 초반까지는 종교음악이거나 전래민요였다. 이 시기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을 거치며 구교도인 아일랜드인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영국인 밑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아일랜드 음악에는 '트러블'이라는 단어 자주 등장한다. 영국인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18세기 아이리시 음악을 대표하는 이는 털로 오캐롤란Turlough O'Carolan이다. 그는 18세기 아일랜드를 순회하면서 하프 연주를 했고 지금껏 전해지는 악보들을 남겼다. 오캐롤란이 연주한 하프는 아이리시 음악의 중요한 악기인데, 이외에도 일리언 파이프,틴 휘슬, 보란, 피들 등이 있다. 오캐롤란 이후 18세기에 아이리시 트래디셔널 음악이 형성되고 근대화되었다. 또 음악을 연주하면서 jig와 reel이라는 춤을 춘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아일랜드는 1800년 영국에 병합되었다. 1840년대는 감자 흉년으로 수난을 겪으며 대규모 해외 이주. 이 시기 조지 페트리는 아일랜드의 음악을 수집하였다. 
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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