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부터 유럽 각국의 작곡가들은 각자의 음악을 표출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는 지역과 국가에 따라 민속적이고 민족적인 요소가 나온다.
베드리지히 스메타나는 보헤미아 쪽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1824년에 탄생한 그는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았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체코 혁명에 나섰으나 실패한 후로 1856년부터 스웨덴에서 활동하는데, 이때 리스트와 친구가 된다.
그는 민족주의 음악은 민요를 목적이 아닌 하나의 기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인들>은 음악적으로 민속색이 강하지 않다.
그는 그러나 체코의 농민생활을 오페라 <팔려간 신부>에 담았고. 오락적인 희극인 이 작품의 민족적 색채 뚜렷하다. 폴카와 푸리안트 같은 민속적 춤곡이 포함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오페라 <LIVUSE>, <악마의 법>에서도 민족주의적 요소 사용했으며, 바그너의 영향을 당시에 많이 받았다.
1874~1879년 만들어진 <나의 조국>은 6곡으로 이뤄진 교향시이다. 그의 조국의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삼은, 그의 대표작이다. 제1곡 〈뷔세흐라드 Vysehrad>, 제2곡 〈블타바 Vltava〉, 제3곡 〈사르카 Sarka〉, 제4곡 〈체히의 목장과 숲속에서 Zčeskych luhv a hájuv〉, 제5곡 〈타보르 Tábor〉, 제6곡 〈블라니크 Blanik〉가운데 제2곡이 가장 유명하다.
강이름에서 제목을 가져온 '블타바'는 독일어인 '몰다우(moldau)'로 더 크게 알려졌다. 보헤미아의 남북을 가르는 이 강과 그 풍경을 통해 국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스메타나는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음악을 개척했다.
제1부 음반 통째로 듣기
정태춘, 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그리고 3과 4의 합인 7은 행운의 숫자라고들 한다.
숫자 7은 다른 한편으로 죄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영화 '세븐'에는 일곱가지의 죄악이 나옵니다.
등장 탐식, 탐욕, 나태, 교만, 정용, 시기, 분노... 행운이든 죄악이든 7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숫잡니다.
7의 제곱인 49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리구요. 수정 후 7주일쯤 지나면 뇌가 만들어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한번씩 재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 재를 일곱번째로 여는 것을 바로 칠칠재,
사십구재라고 하죠. 이로써 49일동안 남은 자들은 떠난 이가 좋은 곳에 가기를 기원합니다. 수정된 후의 49일, 사후의 49일.
칠칠이 사십구를 외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자리를 잡는 거지요.
7월 장마가 한창인 요즘인데요. 곧 찾아올 무더위를 버틸 준비는 하고 계십니까?
앞으로 49일이 지나면, 8월까지 다 가고 9월이 올 것입니다.
<7> - Prince
<The Anthem> - Good Charlotte
-인제는 클래식 리마엡니다-
<나의 조국 - 2악장 몰다우> - 스메타나 (Radio Symphony Orchestra Ljubljna 연주)
<Love Game> - Lady Gaga
<Testify> - The Simpsons Characters (마스_ 님 신청곡)
<Lose yourself> - Eminem (와그라노 님 신청곡)
<Fire In The Rain> - Masi
<별이 진다네> - 여행스케치 (유유 님 신청곡)
Sonny rollins는 단순한 멜로디의 작곡과 연주를 즐겨하며, 난해하지 않지만 기발한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그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발표한 <dig>은 하드밥의 교과서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는 1955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 참여 제의를 거절한다. 그 자리는 존 콜트레인이 대신 차지한다.
1959년에 나온 <<sexophone Colossus>>은 그의 대중적 성공작으로
<St.Tomas>가 담겨져 있다. 그는 이 음반에서 카리브음악, 특히 트리니다드의 칼립소 음악을 재즈에 응용했다.
롤린스는 잠적 행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장기간 잠행은 무려 세 차례나 이뤄졌다.
첫번째는 1954년부터 1년동안 마약을 끊기 위해서 이루어진 잠적이었다.
두번째는 오넷 콜맨의 즉흥연주에 충격을 받아 1957년 <<Way Out West>>에서 피아노를 제외하고 트리오 녹음을 하기도
했던 그가 부단한 연주를 위해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뤄졌다.
소니 롤린스는 달밤에 시내 외과의 다리 위에서 유람선을 바라보며 엄청난 연습을 했고, 컴백 후에는
RAC 빅터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다리 위의 연습 탓에 음반 제목은 <<The bridge>>였다.
사실 이후 3년간 음반 6장은 모두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나중에 평론가들의 재평가를 받게 된다.
세 번째 잠적은 동료 존 콜트레인의 죽음에서 충격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67~1970년 인도에서 수양했고,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