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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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에 등장해 한결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연주를 보여준 장르가 쿨 재즈다. 쿨 재즈는 백인들이 많았던 미 서부에서 유행하였다. 캘리포니아를 주무대로 활동한 데이브 브루벡은 바로 그 웨스트코스트 재즈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마일스의 9중주단에 영감을 받아 매우 클래시컬한 재즈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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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재즈는 음악에서 소리로 넘어가야 한다. 무용이 움직임으로 가는 것처럼. 록밴드 드러머에서 전위음악인이 된 흑우 김대환의 지론이다.

원래 그는‘애드 포’가 첫 음반을 내기 직전까지 신중현과 함께 록과 블루스를 연주했다. 조용필, 최이철(훗날 ‘사랑과 평화’)을 대동하고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했다는 것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내 그가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함의 미학이다. 드러머는 스네어, 베이스 드럼, 심벌, 탐 등 다양한 악기를 모아서 연주한다. 그러나 김대환이 택한 것은 하나의 북이다. 사실 북 하나에서도 여러가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한 손에 여러 채를 잡았다. 

한꺼번에 여섯 개의 채를 잡는 그의 방식은 보는 것만으로 진기한데 그의 공연에는 두가지 더 특이한 것이 있다. 하나는 연주 직전에 손에 물을 묻혀 창호지에 글씨를 쓰는 퍼포먼스다. 그는 종이 뒤에서 거꾸로 문장을 써내려가는데 이는 관객들 입장에서는 글씨가 바르게 보인다. 다른 하나는 무대에 등장해 뻥뻥거리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그에게는 이것도 음악이었다. 그는 비내리는 날의 바이킹을 즐기며 헬멧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음악삼아 즐겼다.

북 연주와 바이킹이 그의 동적 활동이라면, 세서미각은 정적 활동이다. 그는 쌀 한톨에 200여자의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죽산 조봉암의 영향이다. 악극단과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김대환의 외삼촌은 그를 경찰학교에 입학시켰다. 경찰직은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졸업 뒤 그가 맡은 임무는 외숙모의 친오빠이기도 한 조봉암 선생의 경호였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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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ny rollins는 단순한 멜로디의 작곡과 연주를 즐겨하며, 난해하지 않지만 기발한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그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발표한 <dig>은 하드밥의 교과서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는 1955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 참여 제의를 거절한다. 그 자리는 존 콜트레인이 대신 차지한다.  

1959년에 나온 <<sexophone Colossus>>은 그의 대중적 성공작으로
<St.Tomas>가 담겨져 있다. 그는 이 음반에서 카리브음악, 특히 트리니다드의 칼립소 음악을 재즈에 응용했다.

롤린스는 잠적 행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장기간 잠행은 무려 세 차례나 이뤄졌다.
첫번째는 1954년부터 1년동안 마약을 끊기 위해서 이루어진 잠적이었다.

두번째는 오넷 콜맨의 즉흥연주에 충격을 받아 1957년 <<Way Out West>>에서 피아노를 제외하고 트리오 녹음을 하기도
했던 그가 부단한 연주를 위해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뤄졌다.

소니 롤린스는 달밤에 시내 외과의 다리 위에서 유람선을 바라보며 엄청난 연습을 했고, 컴백 후에는 
RAC 빅터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다리 위의 연습 탓에 음반 제목은 <<The bridge>>였다.
사실 이후 3년간 음반 6장은 모두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나중에 평론가들의 재평가를 받게 된다.

세 번째 잠적은 동료 존 콜트레인의 죽음에서 충격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67~1970년 인도에서 수양했고,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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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재즈계를 대표한 인물이 루이 암스트롱이었다면, 1940년대는 디지 길레스피의 시대였다. 트럼펫 주자인 디지 길레스피는 뉴욕의 클럽가에서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와 짝을 이루어 활약하면서 비밥 재즈를 개척했다. 디지 길레스피는 후배인 마일스 데비이스에 비해 주법이 강하고 남성적이었다.

디지 길레스피가 뉴욕으로 진출한 것은 1937년. 콜맨 호킨스, 얼 하인즈 등과 교류하며 듀크 엘링턴 악단에 참여했다가 빌리 엑스타인 악단의 원정공연에 참여한다. 찰리 파커, 사라 본, 아트 블래키와 관계를 맺은 것도 이즈음이다. 이들의 공연 도중 세컨드 트럼펫 주자가 불참하는 바람에 새파란 신출내기이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무대에 올랐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본명은 존 벅스 길레스피였는데, 무대매너가 어지러워서 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뺨을 부풀리는 특유의 연주 표정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연주습관 뿐만 아니라 비지니스나 사무적인 측면에서도 외향적이었다. 그는 구부러진 트럼펫으로 특허를 내려고 악기회사에 아이디어를 낸 적도 있었다. 1860년대 이미 프랑스의 뮤지션이 특허신청을 해서 좌절됐지만. 

2차세계대전은 클럽가에 과세 부담을 안겼고 재즈 클럽은 쇠퇴하고 빅밴드 시대도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이때 디지 길레스피는 동료들과 함께 즉흥적인 잼세션을 통해 새로운 재즈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빅밴드 스윙의 퇴조는 재즈의 대중성이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비밥의 시대가 열리며 뮤지션들의 독자적인 고민은 한층 더 풍성해졌다. 비밥이라는 용어는 디지 길레스피의 곡 <Bebop>에서 유래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스윙시대 4비트를 기본으로 했던 재즈는 비밥으로써 8비트 중심의 음악이 되었고, 흑인적인 리듬이 전면에 대두되었다. 디지 길레스피는 쿠바 흑인음악에도 접근하여 <Monteca>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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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첫 출연한 JP! 초장부터 몽니를 제대로 부리셨다.

얼마 전 내한공연한 Five Peace Band의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과
그가 몸담은 밴드 Mahavishnu Orchestra를 소개하다.

1960년대 후반께 재즈록을 시도하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In A Silent Way>>와 <<Bitches Brew>>를 차례로 발매하는데...
전위적인 프리 재즈에 도전하던 영국 재즈 뮤지션 존 맥러플린은
미국으로 건너가 마일스와 조우하고, 이 음반에 참여한다.

그후 토니 윌리엄스(드럼)와 함께한 Lifetime을 거쳐 결성한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
거의 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음악세계에
인도신화의 신 이름을 따온 그룹명에서도 알 수 있듯 동양적인 색채가 가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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