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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 1집(1990).

[특집] 로큰롤 썸머 나잇!
을 표방한 헤비메틀 나잇?

소년 시절 메틀 보컬리스트를 꿈꿨던 그.
그는 머리가 굵어가면서 메틀이 좀 유치하단 생각도 했습니다.

체인을 바지에 걸고 다녔습니다. 그치만 디자인이 빤한 메탈 티는 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느 잡지에서 읽기도 했습니다. 메탈 티가요, 여자들이 싫어할 만한 아이템이라네요.

하지만, 싫어할 테면 싫어해라! 소년 시절이든 청년 시절이든 변치 않는 자존심 그리고 객기.
어떤 락커는 말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든 척할 뿐이라고.
유치함을 숨기지 않는,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음악. 헤비메탈은 그런 이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Metal Gods> - Judas Priest
<Crazy On You> - Heart

<Take The Time> - Dream Theater
<Paradise Lost> - Symphony X

<Far Beyond The Sun> - Yinwie Malmsteen

<바람을 타고> - 블랙홀
<Overnight Sensation> - Firehouse
<I don't Know> - Sebastian Bach (Randy Rhods Tribute)

<Symphony Of Destruction> - Megadeth
<Cowboys From Hell> - Pantera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 크래쉬

<Youth Without Youth> - 갤럭시 익스프레스
<주연배우> - 백두산

<King Of Rock And Roll> - Dio


Posted by 김수민
롤라팔: 반갑다. 나는 스물 여덟살 젊은이다. 1943년에 태어나 1970년도에 사망한 당신도 한국 나이로 치면 죽을 무렵 스물 여덟살이다. ‘갑’끼리 이렇게 만나서 참 반갑다.
제니스: 한국식 나이는 기수가 아닌 서수 개념인가 보지? 그럼 당신은 1982년생인가 본데, 난 당신보다 39년 일찍 태어났다. 뭐, 사실 미국인이 한국인과 같은 경어를 쓰는 건 아니라 어차피 상관 없지만 말이다. ‘펄(pearl)’이라고 불러달라.

롤라팔: 내가 죽으면, 저승짬은 내가 당신한테 한참 못 미치니 그때는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제니스: 누나누나해~) 보컬열전의 다섯 번째 인물로 선정되셨는데, 예전의 연재물을 본 적이 있나?
제니스: 도착하기 전 한 번 쭉 훑었다. 네 명 다 내가 죽은 뒤에 데뷔한 이들이라 이름을 처음 들었다. 전부 다 남자라는 것이 좀 거슬렸지만 취향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다들 로커들이고, 메틀 뮤지션이었거나 그런 경력이 있더군. 편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롤라팔: 그 점은 잘 알고 있고 앞으로 주의를 많이 기울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록팬이라는 게 펄한테는 유리했다. 그게 펄이 아네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를 앞질러 보컬열전에 출연하게 된 원인이었다.
제니스: 조치 안타. 당신은 아네사를 나보다 앞서 다뤘어야 했다.

롤라팔: 펄은 베시 스미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알고 있다.
제니스: 맞다. 그녀 묘비의 절반을 산 적도 있다. (롤라팔: 나머지 반은?) 어떤 간호사가 샀다던가? 그리고 나는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 오티스 레딩도 좋아한다. 그의 필모어 공연을 감동 깊게 관람한 적도 있다. 나중에 오티스 레딩도 다뤄주었으면 한다. 아네사에 대해서 하나 흥분되는 기억이 있다. 그녀는 1968년 타임지의 6월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나에게 "백인 록 운동에서 탄생한 가장 강력한 가수"라는 칭찬을 해주었다.

롤라팔: <보그>지는 당신에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노래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는 찬사를 보냈다. 리처드 골드스타인이라는 평자는 "그녀는 타르처럼 살금살금 걸어다니며 전쟁처럼 얼굴을 찌푸린다. 그녀는 조調를 무시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기관총처럼 소리를 뿜어댄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라고도 했다. 그가 당신에게 "록계를 이끄는 최고의 여성 로커"라고 한 것은 물론이다.
제니스: 비평가들 전부가 내게 호의적지는 않았다. 1968년 2월 <롤링스톤>지는 내가 몸담은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에 꽤나 비판적이었다.

롤라팔: <롤링스톤>은 펄을 “로큰롤의 주디 갈란드”라고 하기도 했다지? 주디 갈란드처럼 예쁘다는 뜻은 아닐 테고. (서로 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신이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를 떠나 ‘코즈믹 블루스’로 옮기고 나서도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빅브라더’와의 결별은 아마추어리즘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 자리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테지만, 수익금 문제도 그렇다. 빅 브라더에 있을 때 당신은 멤버들과 똑같이 돈을 나누어 가졌으나, 코즈믹 블루스는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었고 특히 당신은 높은 지명도를 인정받아 멤버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졌다.
제니스: 그래서 코즈믹 시절은 쇼비지니스의 논리가 한층 더 강하게 내 삶을 덮은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즈음 내가 사치를 했다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롤라팔: 코즈믹 시절 도리어 빅 브라더와 재결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밴드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지루하며 불안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제니스: 코즈믹 블루스의 음악엔 브래스 섹션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음색이 트럼펫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누이 꼬집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수용하지 않았다. 코즈믹은 프로적 전문성이 있는 밴드였다. 금방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1969년도 나는 블루스의 부활을 상징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뉴스위크지의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다.

롤라팔: 어쨌든 빅 브라더의 매력과 코즈믹 블루스의 강점이 어우러져 세 번째 밴드 ‘풀 틸트 부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이어졌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잦은 설왕설래는 코즈믹 블루스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펄의 독특한 목소리와 창법에 대해서도 폄하가 없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이 제대로 발성의 노하우를 갖추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댔다고 여긴다. 펄은 언젠가 스테이플즈 싱어즈와 동시에 한 무대에 서는 걸 거절하기도 했다. 자신감 부족이었는가?제니스: 솔직히 비난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나는 원래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게 힘겨울 만큼 숫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느 화가의 작품을 본 뒤 그림을 포기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어떤 분야든 하지 않았다”고 했다더라.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특유의 신음과 비명조차도 사전에 충분히 계획했다. 당신은 내 보컬에 어떤 면모에 가장 신경이 쏠리나?

롤라팔: 당연히 그 탁성이 아니겠는가. 한국에 박경림이라는 방송인이 있다. 거의 음치에 가까운 노래로 가끔 사람들을 웃겨 놓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당신과 좀 비슷하다. 시간나면 검색해 보기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경림씨가 펄의 <Summer Time>을 방송에서 카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제니스: 대학 밴드 시절부터 빅 브라더 입단 전까지, 내게는 맑은 목소리도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도 목구멍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지? 나는 관중의 호응도에 따라 스타일을 바꿨다. 청승맞게 부르기도 하고, 쥐어짜듯 부르기도 했다. 하루는 내게 조안 바에즈와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 관중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나머지 반은 환호했던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톤을 잡아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한편으로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 위스키 같은 목소리가 되었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도 있다.


박경림씨에게 이 노래를 권한다.


롤라팔
: 펄은 역시 '풀 틸트 부기' 시절 목소리가 더 풍성했고 샤우팅과 읊조림도 탁월하게 어우러졌던 것 같다.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당신이 처음 음악을 접하던 어린 시절부터 조화에 쓰일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리라는 느낌도 받았다.
제니스: 고향인 텍사스와 그 부근의 루이지애나는 민속음악이 풍부한 곳이었다. 여기에 컨트리, 블루스, 멕시코 음악까지 흘러 들어왔으니... 나는 1962년 텍사스 나콕도체스 은행의 CF 송을 불렀다. 내 인생에서 최초로 녹음한 이 노래는 포크의 거장 우디 거스리의 <This is your land>를 편곡한 것이었다. 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인 가스펠 음악인들과도 교류했었다. 음악 뿐 아니라 내 성장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깃들어 있다. 나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이해받고 사랑받지는 못했다. 외로웠다.

롤라팔: 당신의 고립과 쓸쓸함에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로 지목되었던 데에는 당신이 학생단체들의 비위를 거스른 측면이 있었을 것이니까.
제니스: 뭐, 그랬다. 그랬었다....... 범생이들이 나를 미워했던 게지. 나도 그들을 자극했었고. 하지만 남들이 나를 못생긴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오기도 했다. 고향에 들어와서는 결혼하려고 했다. 실패했지만. 결혼의 실패는 내가 노래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후로도 죽기 전까지 나는 몇차례 결혼을 간절히 원했고 추진했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죽은 해인 1970년도에 난 1년 뒤에 아이를 가질 생각도 했었다.

롤라팔: 아이 이야기는 의외다. 결혼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물론 달리 고려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결혼제도가 강제하는 1부1처제는 얼마간의 평등을 담보해준다. 결혼이 유구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섹스 상대를 최소한 1명 정해둘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제니스: 외모 콤플렉스와 결혼시도의 실패는 내가 대중들의 인기를 갈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모습이 왜곡되거나 부풀려진 것도 많다. 남우세스러운 사연을 고백하자면, 나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거나 하는 일들을 좀 과장해서 주변에 말하곤 했다. 난 툭하면 일탈을 일삼고 다 뒤엎길 좋아하는 겁 없는 반항아는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과 한 번도 연락을 단절한 적 없다. 죽을 무렵 친하게 지냈던 폭주족 친구 하나는, 내가 죽은 직후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음, 그인, 참으로, 유순, 한 사, 사람이, 었다.

롤라팔: 펄에게는 허세가 어려 있다. 하지만 그 허세가 얼마나 진실했던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될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 화제로 나가보자.
제니스: 당신은 인터뷰를 제의하면서 마약과 이성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나버린 전생의 일이라 개의치 않았는데, 지금은 당신의 제의가 새삼 고맙다. 이쯤 하자.

롤라팔: 당신은 1960년대 후반 한창 활동한 뮤지션이다. 당시 미국 청년들은 유럽 청년들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사적이었기는 했으나, 히피들은 마리화나나 LSD에 못잖게 ‘러브 앤 피스’에 미쳐 있었고, 반전운동, 민권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그 시기 유럽의 절정이 1968년이었다면 미국의 절정은 이듬해인 1969년 우드스탁이었을 것이다. 펄도 그 무대에 섰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잠깐 코멘트해줄 수 있는가?
제니스: 코멘트를 ‘잠깐’ 해달라는 부탁은 당신의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면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1968년 그해 여름, 일련의 정치적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책깨나 읽었던 반면, 신문과 잡지는 거의 접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사적’이었다는 특징만 나와 관련 있다.

롤라팔: 당신은 1969년 11월 16일 확성기를 들고 관중들에게 명령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이는 마이애미에서 짐 모리슨이 성기노출을 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과 맞물리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두 사건은 청년문화의 좌초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반격을 상징한다.
제니스: 실제 나의 죽음은 록계의 전반적 쇠락이라는 흐름에 실려 찾아오기도 했다. 우드스탁 다음에 열린 페스티벌은 개판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알타몬트에서는 흑인 참여자가 살해 당했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이었다. 어른들은 강했다.

롤라팔: ‘어른’이라. 그렇다. 당신이 죽고 10년이 지나, 당신의 조국의 대통령이 된 그 양반만 봐도 그렇더라. MTV 이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시대가 왔지만, 강한 놈들은 늘 음흉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그들의 웃음보다 더 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끝으로 한 말씀.
제니스: 한국에서는 제사라는 풍습이 있다지? 10월 4일, 내 기일을 챙겨달라. 마음으로.
롤라팔: 알겠다. 그 하루 전날이 한국 민족 대다수가 자신들의 공통 조상이라고 착각하는 어떤 이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리는 날이다. 그날보다 펄의 생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의미 있다. 오늘 인터뷰 고마웠다. 한 잔하러 가자.

Posted by 김수민

롭 핼포드가 '본좌'로니 제임스 디오가 '킹왕짱'이라면,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은 '완소(완전소중)'에, '캐간지'다. 보컬열전에서 세 번째로 소개하고 있으나, 데이빗 커버데일은 내가 핼포드 이상으로, 디오 못지 않게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이다. 나는 록팬이라는 사람과 만났을 때 상대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가 왜 좋은지를 모르겠다거나 혹은 아예 그를 모른다고 하면 대화를 길게 나누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 일반은 물론이고 록매니아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새내기 시절 록음악을 크게 틀어주는 신촌 한 구석의 술집에 출입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발길을 끊고 이듬해 '우드스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하루는 내가 Impellitteri의 곡을 신청했다. 주인장은 죄송하지만 음반이 없어 못 틀어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Loudness의 곡을 주문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주크박스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지 않고 음반만으로 레파토리를 채우는 술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whitesnake의 <Here, I go again>을 청했다. 그러자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없는 곡만 신청하시니 난감하네요. 요즘 누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들어요?" 내가 되묻고 싶었다. 1970년대에 나온 레드 제플린은 틀어주면서, 1980년대에 나온 걸 가지고, 뭐? 누가 듣냐고? 

그러나 일말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 밴드들에 비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당장에 일본과 견줘도 그렇다. 바로 이 화이트 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이자 리더가 데이빗 커버데일이다. 물론 데이빗 커버데일은 1970년대 최강의 밴드 Deep Purple의 멤버이기도 했다. 화이트 스네이크를 전혀 접한 적 없더라도, 기타 아르페지오가 애잔하게 흐르는 <Sodier of fortune>을 들어본 이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에서 Deep Purple은 <Highway Star>, <Smoke on the water>로 더 유명하다. 이곡들은 데이빗 커버데일이 입단하기 이전, 이안 길런이 마이크를 잡고 있던 2기 시절의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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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캐간지랄 수밖에...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에 가입할 때만해도 상점 종업원을 전전하던 무명의 가수지망생이었다. 게다가 촌뜨기였다. 심지어는 사팔뜨기였는데 리치 블랙모어(딥 퍼플의 리더, 기타리스트)한테 고치라는 경고를 받고 수술도 없이 자가교정에 성공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커버데일의 음성은 전임자 이안 길런과는 상이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지역별, 계급별, 인종별로 향유하는 장르가 크게 달라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된다. 커버데일은 백인이지만 어릴 적 내내 오티스 레딩과 같은 블루지하고 소울풀한 음악을 라디오로 듣고 자라며 꽤 흑인에 근접한 필을 가지게 되었다. 이안 길런이 날카롭게 찔러대는 창법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면, 커버데일은 굵직하게 울부짖는 흉성으로써 딥 퍼플의 3기를 장식했다. 그때의 대표곡이 <Burn>, <Stormbringer>.

딥 퍼플에는 사실상 한 명의 보컬리스트가 더 있었다. 그는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로, 데이빗 커버데일보다 고음에 능하고 라이브에서 더 안정된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탓에 경쟁심이나 갈등이 없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둘은 서서히 딥 퍼플의 노선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점차 밀려나던 리더 리치 블랙모어는 중세풍 취향을 공유한 엘프의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와 눈이 맞아 레인보우를 창설하며 딥 퍼플에서 나갔다. 제임스 갱 출신의 토미 블린이 후임 기타리스트로 들어왔으나 곧 딥 퍼플은 해산하였고 커버데일에게는 첫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유라이어 힙으로 영입될 뻔하다 탈락한 것도 이 시절의 일화다.

그러나 딥 퍼플에서 만난 존 로드(건반) 등과의 인연은 쭉 이어졌고 닐 머레이 등이 가담하면서 1970년대 말 화이트 스네이크가 결성되었다. 초기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은 후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하드 록이나 헤비메틀보다는 블루스 록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한 이때의 음악이야말로 커버데일이 가장 편하고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의 굵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노래를 어렵게 끌고 가는 커버데일의 나쁜 버릇도 꽤 교정되었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딥 퍼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레인보우와 경쟁하는가 하면, 존 로드가 재결성된 딥 퍼플로 향하면서 잠깐 흔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둥 같은 드러밍으로 유명한 코지 파웰이 있었고, 씬 리지 출신의 존 사이크스가 들어오면서 1984년도 <<Slide in it>>이라는 걸작이 나왔다.

허나 두 번째 위기가 도래했다. 데이빗 커버데일의 성대 이상. 의사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선고할 수준이었다. 존 사이크스를 대동해 메탈씬을 정복하려던 꿈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3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거꾸로 말해, 커버데일은 마침내 장애를 딛고 3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7>>. 화이트 스네이크의 최대 히트 음반이었다. 존 사이크스의 기타에선 불꽃이 튀었고 커버데일은 더 역동적으로 거듭났다. 한결 세련된 편곡을 거쳐 재수록된 <Here I go again>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특별히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속 발라드인 <Is this love?>도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올랐다.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이 본격적인 메틀로 '여기서, 다시 나아감'으로써, 데이빗 커버데일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성향도 더 짙어졌다. 스스로 리메이크한 <Crying in the rain>에서 그의 변천 또는 진화는 유감 없이 드러났다.

존 사이크스가 음악적 불화로 탈퇴했음에도 화이트 스네이크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탈퇴 후 블루 머더의 깃발을 꽂은 존 사이크스는 딥 퍼플 시절의 글렌 휴즈와 더불어 '데이빗 커버데일과 밴드를 같이 한 다음 보컬리스트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비언 캠벨이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 나가고, 더블 기타 시스템의 한 축이던 에드리언 반덴버그가 손가락을 다쳤지만, <<Slip of the tongue>>의 제작 와중에 멋진 구원투수가 들어왔다. 스티브 바이. 촌티 풀풀 날리는 블루지 넘버 <Fool for your loving>이 그의 손을 거쳐 말끔하게 번뜩이는 곡으로 탈바꿈되었다. 예전의 중후한 느낌을 더 선호하는 팬들도 많겠지만, 다시 실린 <Fool for your living>에서 감정을 눅이기보다는 폐부를 찔러대는 쪽을 택한 커버데일의 보컬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붐이 락씬을 휩쓸며 화이트 스네이크는 여느 메틀 밴드처럼 쇠락하기에 이른다. 그후 커버데일은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Coverdale & Page를 구성해 '꿈의 블루지 콤비'를 이루는가 하면, 화이트 스네이크를 재결성하기도 하고, 솔로 음반에서 밴드 시기 못다한 블루스, 소울, 컨트리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커버데일이 원초적으로 지닌 매력을 감상하려면 이 시절의 음악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커버데일에게는 여러가지 단점이 있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고음에서의 약점을 노출시켰으며, 밀어붙이듯 고음을 올리더라도 갑자기 음성이 얇아지는 양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치더라도, 라이브에서의 고질적인 불안함 때문에 매니아들의 입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마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게 있다. '노이즈가든'의 멤버 박건이 영국에서 화이트 스네이크 공연을 보고 신해철에게 귀띔한 바, "그냥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용서된다". 그는 목소리로나 외양의 분위기로나 지극히 남성적인 동시에 당대에서 제일 섹시한, 하드록/헤비메틀 사상 '가장 완벽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였다. 곡이 매듭지어지면서 나오는 한숨소리마저 당당히 노래의 한 영역을 차지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멸하지 않고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은 그 관능미의 극치였다. "로큰롤과 섹스는, 힘들어도 끝낼 수 없다는 점에서 같다"는 명언도 커버데일쯤 되어야 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커버데일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은 가수들이 있다. 김태화, 임재범, 박완규, 양원찬(전 블랙신드롬) 등은 문헌이나 방송, 입소문을 통해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들이다. 신성우, 서문탁 같은 이들에게서도 커버데일과 비슷한 어프로치를 엿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커버데일의 후예들은 어쩌면 로버트 플랜트나 프레디 머큐리(퀸)를 사숙한 이들 못지 않은 세를 형성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러한 보컬리스트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굵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R&B를 소몰이 창법으로 부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7년 전, "요즘 화이트 스네이크를 누가 들어요?"라고 타박받은 나는 날이 갈수록 복고주의자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을 확인하더니 "수구세력이시네요"라고 농담하더라.

Posted by 김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