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재즈는 음악에서 소리로 넘어가야 한다. 무용이 움직임으로 가는 것처럼. 록밴드 드러머에서 전위음악인이 된 흑우 김대환의 지론이다.

원래 그는‘애드 포’가 첫 음반을 내기 직전까지 신중현과 함께 록과 블루스를 연주했다. 조용필, 최이철(훗날 ‘사랑과 평화’)을 대동하고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했다는 것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내 그가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함의 미학이다. 드러머는 스네어, 베이스 드럼, 심벌, 탐 등 다양한 악기를 모아서 연주한다. 그러나 김대환이 택한 것은 하나의 북이다. 사실 북 하나에서도 여러가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한 손에 여러 채를 잡았다. 

한꺼번에 여섯 개의 채를 잡는 그의 방식은 보는 것만으로 진기한데 그의 공연에는 두가지 더 특이한 것이 있다. 하나는 연주 직전에 손에 물을 묻혀 창호지에 글씨를 쓰는 퍼포먼스다. 그는 종이 뒤에서 거꾸로 문장을 써내려가는데 이는 관객들 입장에서는 글씨가 바르게 보인다. 다른 하나는 무대에 등장해 뻥뻥거리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그에게는 이것도 음악이었다. 그는 비내리는 날의 바이킹을 즐기며 헬멧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음악삼아 즐겼다.

북 연주와 바이킹이 그의 동적 활동이라면, 세서미각은 정적 활동이다. 그는 쌀 한톨에 200여자의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죽산 조봉암의 영향이다. 악극단과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김대환의 외삼촌은 그를 경찰학교에 입학시켰다. 경찰직은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졸업 뒤 그가 맡은 임무는 외숙모의 친오빠이기도 한 조봉암 선생의 경호였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Posted by 김수민

쿠바 혁명은 음악시스템을 바꾸었다. 나이트클럽이 아닌 국가 정책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특히 '트로바의 집'을 통해 노에바 트로바가 등자한다.
트로바란 과히라, 과라차, 푼토, 볼레로 등 국제적인 음악 형식을 포괄하고
유럽의 오페라를 수용하여 형성되었다.
한두명의 가수와 기타, 클라베로 반주하는 트리오 형태였는데, 쿠바 민요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댄스 음악 대중화 이후 트로바는 쇠퇴했지만, 로컬 음악으로 존재하던 걸 정부가 재발굴한 것이다. 

카를로스 푸에블라는 1950년대 중반 로스 트라디씨오날레스 라는 그룹 이끌며 쿠바 혁명의 음악 대표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실비로 로드리게스, 파브로 밀라네스가 등장하여 사회주의 메시지 결합하였다.
누에바 트로바는 누에바 칸시온과 교학상장의 관계에 있는데, 누에바 칸시온은 독재정권 저항하는 음악이었다면
누에바 트로바는 혁명정권의 직간접적 후원 아래서 발전한 음악이었다.
누에바 트로바는 단순한 관제 기성세대의 음악이 아니다. 후안 카를로스 포르멜 같은 젊은 음악인도 있다. 

한편 쿠바에서 뉴욕으로 1940년대 이주한 음악인들이 미국 재즈 뮤지션과 함께하며
아프로쿠반 재즈가 발전했다. 혁명 이후에도 재즈는 있었다. 국립예술학교의 정규과목에도 삽입되었다.
쿠바에서는 혁명 이후 뉴 쿠반 재즈 탄생한 셈이다. 이라케레가 뉴 쿠반 재즈의 대표적 밴드다.
이들은 라틴 재즈, 비밥, 쿠바 민속음악을 전염성 강한 리듬에 결합시켰다. 바타 드럼 사용하여 손 바타, 바타 룸바로 불리웠다. 이라케레는 미국 민주당 카터 행정부 시절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피아니스트 곤살로 루발카바 가 등장해 뉴 쿠반 재즈에 동참했는데, 그는 1993년 미국 망명하고 말았다.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서 쿠바 뮤지션들은 연주할 기회를 가졌다. 로스 반 반이 대표적이다. 로스 반 반은 공산주의 밴드로 찍혀 1999년 어렵게 마이애미에서 공연을 가졌다. 1969년 결성한 이들은 오랜 기간동안 끊이지 않고 활동함으로써
쿠바의 롤링 스톤스가 되었다. 그들의 장르는 송고로, 손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손을 혁신한 것이다.
아프로쿠반은 물론 다른 캐러비안의 리듬을 수용했다.

로스 반 반을 기점으로 새로운 세대의 음악은 팀바로 발전했다. NG 라 반다가 대표적 그룹이다. 리더인 호세 루이스 코르테스는 다름아닌 이카케레의 전 멤버. 팀바는 쿠바 음악보다 정열적이고 광적이며, 손이나 송고보다 즉흥성 더 강하다. 거리의 댄스 음악으로 하이퍼 살사라고도 한다.

이후 룸바를 록 사운드에 접목한 신테시스, 전통적 손에 가까운 시에라 마에스트라, 모던 손의 쿠바니스모 등
제3세대 음악인들도 출현하였다. 한편 룸바는 뉴욕에 상륙해 살사가 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음악이 혼합된 쿠바 음악이 미국 음악과 혼합한, '혼합의 혼합'을 이룬 셈이다. 

Posted by 김수민

1부 음반통째로 듣기
DJ 소울스케이프 <100g Beats>

단순반복에 의지한 퇴행현상. 이젠 약발이 다했기에 곧 변화가 올 것이다. 후크송을 둘러싼 근래의 논평들이다.

후크는 반복되면서 사람의 귀를 잡아끄는 악굽니다.  후크송은 후크 위주로 된 노래구요. 
그런데 대중음악에서 후크송과 후크송 아닌 걸 구별할 수 있을까요? 거의 모든 노래엔 후렴구가 있습니다.
또 롹음악엔 강렬하게 마음을 울리는 기타 리프가 있죠.

후크송은 좀 더 막 나갔을 뿐입니다. 요새 욕을 먹고 있지만, 후크송 만들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다른 걸로 시간 끌지 않고 반복만 해도 멋진, 그런 멜로디를 만들어야 하죠. 
후크를 반복하면서, 교묘하게 변화시키기도 하구요.

여러분들의 일상도 많은 부분 반복됩니다. 그래도, 심심하지 않을 수가 있죠.
지겹지 않게 반복하거나 멋지게 변주할 수 있는, 후크가 있다면요.

1. <미인> - 신중현
2. <Fire> - 2NE1

[동교동 DJ의 월드뮤직 등권론] 쿠바 2편
3. <Unicornio> - Silvio Rodriguez
4. <Yolanda> - Pablo Milanes
5. <Bacalao Con Pan> - Irakere
6. <Llegue Llegua/ Guararey De Pastorita> - Los Van Van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에서 서리한 사연입니다.
http://www.imbc.com/broad/radio/fm/singlbungl/attend/1463614_12361.html


7. <Rockin' In The Free World> - Simple Minds
8. <손무덤> - Stop Crackdown
9. <Buona Sera> - 이승열

[독방만평] 인권


10. <Human Being> - Van Halen 

 

Posted by 김수민

[명반 통째로 듣기]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세상엔 약한 편을 응원하는 사람도 많다.  이변과 역전만큼 재밌는 것도 드무니까.

하지만 전 언제부턴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비주류란 이길 만한 비주류, 포장된 비주류가 아닌지.
그가 불리하고 몰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자인 경우가 흔하죠.

심지어 이럴 때도 있죠. 사람들은 종종 모함당하는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분노하지만,
모함했다는 죄를 뒤집어쓴 사람이 오히려 모함당하고 있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인 경우 말입니다. 

당신이 눈물로 꽃피우고자 하는 것은 승리와 경쟁입니까, 정의와 사랑입니까?
"나는 약자 편"이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 틈에서 정작 너무나 약한 이들은 쓰러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1. <비주류 클럽> - Taez Band 
2. <Paranoid> - Jonas Brothers

[방노자 이회챵의 두 분 토론] 딥 퍼플 vs. 레드 제플린
3. <Space Truckin'> - Deep Purple
4. <Whole Lotta Love> -  Led Zeppelin
5. <Whole Lotta Love>- Led Zeppelin
6. <Burn> - Deep Purple

[독방만평] 쌍용차와 우울증



7. 서울은 흐림 - MOT (feat. 한희정)
8. <Hero> - Eric Martin
9. <사랑>- 손병휘
10. <노동의 새벽> - 장사익

[남의 방송 사연 뽀리기]
sbs 파워FM 김창렬의 '올드 스쿨'을 털었습니다.
http://wizard2.sbs.co.kr/resource/template/contents/tpl_iframetype.jsp?vProgId=1000317&vVodId=V0000329545&vMenuId=1005191


11. <바보버스> - 삐삐롱스타킹

Posted by 김수민


'김준원'은 '보컬열전'의 네 번째 편이자 한국 보컬리스트 최초 편이다. 지금껏 거명된 네 명 모두가 록 보컬리스트다. 록에 기울어진, 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필자의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앞으로도 아마 대부분을 남성 록커들이 채우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지난 편의 주인공들은 장르를 떠나 걸출한 보컬리스트고 김준원도 그렇다. 내가 한국 보컬리스트들 중 최초로 그를 다루는 이유는 내가 그를 역대 최고의 한국 -'록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보컬리스트라 느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흔히 1980년 중후반 한국 록계를 주름잡은 시나위, 부활, 백두산을 묶어 '한국 메틀의 트로이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4인방'이라는 표현도 있다. H20를 포함해서. 미국에 살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1986년 결성한 H20는  LA메틀 본토에서 직수입된 듯한 무대매너와 패션을 과시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곧잘 '파고다극장의 마지막 헤드뱅어'를 자처하지만, 파고다극장은 내가 어섯 눈뜨기도 전에 문을 닫았으니(그래서 파고다극장은 그저 꿈의 극장이다) '전설'을 전하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H20는 김준원을 위시한 재미교포 젊은이들이 1985년에 만든 밴드 '흙'의 후신이었다. 그들은 이듬해 싱글음반 <멀리서 본 지구>를 발표하며 LA에서 들국화와 공동공연을 펼쳤고, 1987년에 1집을 내놓으며 한국 땅을 밟았다. 2003년 노바소닉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불후의 명곡 <안개도시>가 H20 1집의 첫 트랙이다.

H2O 1집 시절의 김준원 (출처 http://www.h2o4ever.net/)



'한국 메틀의 3대 보컬리스트'라는 표현도 있었다.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는 수사처럼 공허하고 편향적이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가 모두 나이가 엇비슷한 영국인이며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 출신이었던 것처럼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 역시 다들 시나위의 노래꾼들이었다. 대중성, 매니아들 사이에서의 카리스마, 영향력, 생명력 등등을 고려하고 특정밴드에 대한 편중 위험까지 덜어내자면, 그나마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로 1980년대 '3대 메틀 보컬리스트' 를 구성하는 것이 조금 더 온당할 듯하다. 아니, 아니다. 다 무르자. 김준원이 빠졌으니까.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이 1990년대 들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발라드 솔로이스트로 전향하던 무렵, 김준원은 H2O 2기의 멤버들과 메틀의 시대를 접고 있었다. 하기야 이것도 전향이리라. 그러나 그후에 그와 그들이 연 것은 가요의 발전이 아닌 또 다른 록의 시대였다. 1992년 발매된 2집에서 롤링 스톤즈로 회귀한 듯한 복고성과 같은 시기 영국과 미국의 록에서 만개하던 모던함은 그럴싸한 수준을 넘어 온전히 내면화된 채 구현되었다. 노래방에도 있는 <걱정하지 마>가 그 2집의 수록곡이다. 펄 잼이나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은 그런지 스타일의 그룹이 거의 없었던, 그래서 신대철 같은 메틀 밴드 출신들이 결국 1995년 시나위의 재결성에 맞춰 그런지 록을 시도했던 한국에서, H2O는 유앤미블루(방준석, 이승열)와 함께  '얼터너티브 밴드'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김준원은 펄 잼의 보컬, 에디 베더와 곧잘 비교되었다. 메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서 H2O와 펄 잼이 유사했던 탓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진솔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닮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테다. 김준원은 고음에 약하지 않지만 '고음 교조주의'에 편승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중음, 저음, 고음에 모두 능한 가수가 되었다. 또 부활 시절 이승철이 여리고 소년적인 감성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청년의 무르익은 남성성을 구현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극단적인 남성성을 추구했던 임재범과 달리 중성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흉성과 두성은 있었으나  이따금씩은 거의 '맨소리'를 낼 만큼 목소리에 포장이 작았고 꾸미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김준원은 연기자로 치면 나문희나 최진실에 비할 수 있을 정도의 일상성을 획득해 냈다.

1집과 2집 사이에 H2O에 가입해 김준원의 옆에 서고 뒤에 앉은 연주자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카리스마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박현준이 H20의 기타를 잡아 절제되고 감각적인 리듬 배킹으로 밴드의 새 출발을 이끌었다. 베이시스트 강기영은 시나위에서 베이스 줄로 줄넘기를 하다시피하던 용맹한 연주자였다. H2O의 해체 후 강기영은 박현준과 삐삐밴드, 삐삐롱스타킹을 거친 다음, 록의 무대에서 춤판의 한구석으로 내려가 DJ 달파란으로 더 유명해졌다. 드러머는 고등학생일 적 시나위 2집을 통해 데뷔한 김민기였다. 그는 그 앨범 이후로 한국 최고의 드러머로 군림해 오고 있었으며, 1990년대 중반 김종서와 다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김준원은 멤버들을 아울러 밴드의 길을 잡는 일에서 발군이었다. 메틀 뮤지션이었지만, 그것도 메틀제일주의가 한창이던 무렵의 록 키드였었지만, 그의 취향은 잡식성이었다. 김준원과 H20의 이런 열린 태도는 듀스와의 합작품 <Go! Go! Go!>로 나타나기도 했다.

강기영: (...) 그는 INXS를 좋아했다.
- 박준흠,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을> 中


그러고 보니 김준원은 이니시스의 마이클 헛친스와 비슷한 내음을 풍긴다. 강기영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박준흠: 김준원은 어떤 사람인가?
강기영: 그는 인간적이다. 리더십도 있고 동생들을 잘 챙겨준다. 무대에서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었고 말도 잘했다. 그리고 편협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수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H20 음악이 가능했다.


1993년, H2O는 한국 록 역사상 최상급의 걸작인 3집 <<오늘 나는>>을 분만하였다. 박현준의 그루브가 초절정에 이르른 가운데 강기영-김민기는 힘있고도 깔밋한 리듬 라인을 펼쳐고 김준원은 그 위에서 분방하게 놀았다. 한국 록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저음질은 마크 코브린이라는 외국인 엔지니어가 해결하였고, 이정식을 비롯한 브래스 세션의 가세로 곡들은 잘 부풀어오른 프랑스빵처럼 풍성해졌다.

2집에서 창작을 주도했던 강기영이 <고백을 하고>, <짜증스러워>, <나를 돌아보게 해>를, 박현준이 <방황의 모습은>, <착각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을 썼다. 작곡도 세련되었지만 가사도 색달랐고, 가사의 일상성은 김준원의 가식 없는 노래와 완벽히 어우러졌다. 이로써 H2O는 안치환, 블랙홀과 함께 록의 한국적 어법을 위해 고투한 얼마 되지 않는 뮤지션으로 지목될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불행히도 이런 평가는 당시에 제출된 것이 아니다. 3집은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했고 H2O는 해산을 맞이했다.

H20 3집 시절. 왼쪽부터 김민기, 김준원, 강기영, 박현준. (촬영은 김중만. 출처http://www.h2o4ever.net/)



김준원은 오랫동안 밴드 활동을 접었지만 신성우와 더블 캐스팅되었던 <ROCK 햄릿> 등 여러 뮤지컬을 통해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한다(이미 1992년 드라마 <고개숙인 남자>에 얼굴을 내비치며 미미하게나마 연기경력을 쌓은 차였다). 뮤지컬은 그에게 명확한 발음과 다채로운 음색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이는 2004년 발매된 4집 <<Boiling Point>>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예컨대 <pray>는 딱히 높은 음역에까지 닿는 곡은 아니나 어지간한 발음과 발성으로는 온전히 불러낼 수 없다.

4집은 타미 킴(기타), 김영진(베이스)라는 최고의 세션맨을 제3기의 멤버로 불러 들었음에도  '11년만의 재결성'을 언론매체들이 잠시 알렸을 뿐 폭넓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컴백 음반을 발표한 임재범이 '다시 깨어나 달리는 전설'이라면, 김준원은 '안개에 싸인 무관의 제왕'이다. 그렇지만 결혼 이전까지 잠행과 은둔을 거듭했던 임재범과 대조적으로 김준원은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도회인이었다. 그는 극장 무대 위에 있었고, 강남에서 블랙신드롬의 박영철과 함께 운영한 카페에도 있었다.
보수적인 부친 때문에 라디오 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던 교포 소년은 화려한 메틀 키드로, 젠틀한 모던 록커로, 뮤지컬 배우로 -어느 인터뷰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 흐르듯 살아 왔다. 그 물은 주류 음악계의 시스템을 끝내 돌아 흘러, 저주 받은 걸작들을 양산해야만 했다. 그러나 많은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은 결코 H2O 재평가를 향한 옹골찬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들락거린 구미역 앞의 레코드점에는 운좋게 H20의 1집 테이프가 하나 남아 있었고 나는 곧 그 주인이 되었다. 내 행운은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H2O의 3집이 나온지 5년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윤도현, 최정원 주연의 <하드록 카페>가 구미예술회관에 올랐을 때 작품의 음악감독이자 '타잔 아저씨'역으로 열연한 김준원의 노래를 맨 앞자리에서 들었다. 이후로 나는 아무리 좋아해 마지 않는 보컬리스트일지라도 그 목소리가 지겨워질 때면 H2O를 찾았다. 테크닉은 완벽하나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나가는 신인급 가수의 노래를 듣고난 후에도 곧잘 김준원을 켰다.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탄산음료로 갈증을 달랠 수 없을 때, 물을 찾듯 말이다. 이 물은 로커빌리, 블루스, 팝 발라드, 하드 록, 재즈, 펑크, 훵크, 글램, 뉴웨이브, 그런지를 모두 녹여내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김준원과 같은 전천후 보컬리스트는 내 생애 단 하나 뿐일 것이다.

Posted by 김수민

김밥 하나랑 튀김 하나 주세요. 그러면 울동네 분식집 아주머닌 늘 말씀하신다. "계란 먹지요?" 

도시락 위에 깔린 계란 후라이, 참 먹음직스럽습니다. 라면은 또 어떻습니까. 파송송보다 계란탁이 더 절실하죠.
제가 국민학생 때 노점 굵은 떡볶이 하나에 150원이었는데요. 우린 꼭 200원 주고 계란도 하나씩 먹었습니다.
집에 가서 먹을 수도 있는데...... 끓는 고추장 위에 있으니 계란이 더 섹시하더라구요.
이렇듯 계란은 어우러집니다. 삶은... 계란입니다.

계란은 소금만 찍어도... 제맛입니다. 찜질방 계란 장난 아니죠. 찜질방에선 왜 계란을 먹을까요?
음... 찜질방에서 달걀 안 먹고... 고기 굽거나 타조알 먹으면, 이상하니까?
저는 계란에 대해 차암 무식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날계란을 날마다 쪽쪽 날로 잡수시는 사람들이 있죠?
저는 한 친구에게 얼마 전 물었습니다. 수탉도 없는데 어떻게 계란을 맨날 먹을 수 있냐?

전 모르고 살았던 겁니다. 교미 한번만 하면 암탉은 여러날 알을 낳는다는 걸요.
그래도, 좀 무식하면 어떻습니까? 꽉들어찬 노른자, 깨끗한 흰자를 모두 맘에 품고 살면 되죠.
분식집 아줌마가 담아준 계란 튀김, 맛나게 먹고 오늘 방송 시작합니다.
계란은 역시 반으로 잘라 먹는 게 최곱니다. 흰자 노른자 다 보이게요.


1. <egg raido> - bill frisell
2. <소원을 말해봐> - 소녀시대

[보컬열전] 김준원 편

3. 안개도시
4. 걱정하지마
5. 방황의 모습은
6. pray
7. 나는 일지매
- H2O

[독방만평] 북핵과 천성관



 

[남의 방송 사연 뽀리기] KBS 2FM 이현우 방송을 털었슴돠
http://www.kbs.co.kr/radio/coolfm/album/sayeon/index.html

8.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 봄여름가을겨울

 


Posted by 김수민

19세기 중엽부터 유럽 각국의 작곡가들은 각자의 음악을 표출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는 지역과 국가에 따라 민속적이고 민족적인 요소가 나온다.

베드리지히 스메타나는 보헤미아 쪽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1824년에 탄생한 그는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았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체코 혁명에 나섰으나 실패한 후로 1856년부터 스웨덴에서 활동하는데, 이때 리스트와 친구가 된다.   

그는 민족주의 음악은 민요를 목적이 아닌 하나의 기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인들>은 음악적으로 민속색이 강하지 않다.

그는 그러나 체코의 농민생활을 오페라 <팔려간 신부>에 담았고. 오락적인 희극인 이 작품의 민족적 색채 뚜렷하다. 폴카와 푸리안트 같은 민속적 춤곡이 포함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오페라 <LIVUSE>, <악마의 법>에서도 민족주의적 요소 사용했으며, 바그너의 영향을 당시에 많이 받았다. 

1874~1879년 만들어진 <나의 조국>은 6곡으로 이뤄진 교향시이다. 그의 조국의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삼은, 그의 대표작이다. 제1곡 〈뷔세흐라드 Vysehrad>, 제2곡 〈블타바 Vltava〉, 제3곡 〈사르카 Sarka〉, 제4곡 〈체히의 목장과 숲속에서 Zčeskych luhv a hájuv〉, 제5곡 〈타보르 Tábor〉, 제6곡 〈블라니크 Blanik〉가운데 제2곡이 가장 유명하다. 

강이름에서 제목을 가져온 '블타바'는 독일어인 '몰다우(moldau)'로 더 크게 알려졌다. 보헤미아의 남북을 가르는 이 강과 그 풍경을 통해 국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스메타나는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음악을 개척했다.

Posted by 김수민

제1부 음반 통째로 듣기
정태춘, 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숫자 3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처럼 하늘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숫자 4는 동서남북이나 춘하추동 등 땅의 특성을 띤다.
그리고 3과 4의 합인 7은 행운의 숫자라고들 한다.

숫자 7은 다른 한편으로 죄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영화 '세븐'에는 일곱가지의 죄악이 나옵니다.
등장 탐식, 탐욕, 나태, 교만, 정용, 시기, 분노... 행운이든 죄악이든 7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숫잡니다.
7의 제곱인 49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리구요. 수정 후 7주일쯤 지나면 뇌가 만들어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한번씩 재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 재를 일곱번째로 여는 것을 바로 칠칠재,
사십구재라고 하죠. 이로써 49일동안 남은 자들은 떠난 이가 좋은 곳에 가기를 기원합니다. 수정된 후의 49일, 사후의 49일.
칠칠이 사십구를 외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자리를 잡는 거지요.

7월 장마가 한창인 요즘인데요. 곧 찾아올 무더위를 버틸 준비는 하고 계십니까?
앞으로 49일이 지나면, 8월까지 다 가고 9월이 올 것입니다.


<7> - Prince
<The Anthem> - Good Charlotte

-인제는 클래식 리마엡니다-

<나의 조국 - 2악장 몰다우> - 스메타나 (Radio Symphony Orchestra Ljubljna 연주)

[독방 만평] 한-EU FTA

 



<Love Game> - Lady Gaga
<Testify> - The Simpsons Characters (마스_ 님 신청곡)
<Lose yourself> - Eminem (와그라노 님 신청곡)

<Fire In The Rain> - Masi
<별이 진다네> - 여행스케치 (유유 님 신청곡)

Posted by 김수민

Sonny rollins는 단순한 멜로디의 작곡과 연주를 즐겨하며, 난해하지 않지만 기발한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그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발표한 <dig>은 하드밥의 교과서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는 1955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 참여 제의를 거절한다. 그 자리는 존 콜트레인이 대신 차지한다.  

1959년에 나온 <<sexophone Colossus>>은 그의 대중적 성공작으로
<St.Tomas>가 담겨져 있다. 그는 이 음반에서 카리브음악, 특히 트리니다드의 칼립소 음악을 재즈에 응용했다.

롤린스는 잠적 행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장기간 잠행은 무려 세 차례나 이뤄졌다.
첫번째는 1954년부터 1년동안 마약을 끊기 위해서 이루어진 잠적이었다.

두번째는 오넷 콜맨의 즉흥연주에 충격을 받아 1957년 <<Way Out West>>에서 피아노를 제외하고 트리오 녹음을 하기도
했던 그가 부단한 연주를 위해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뤄졌다.

소니 롤린스는 달밤에 시내 외과의 다리 위에서 유람선을 바라보며 엄청난 연습을 했고, 컴백 후에는 
RAC 빅터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다리 위의 연습 탓에 음반 제목은 <<The bridge>>였다.
사실 이후 3년간 음반 6장은 모두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나중에 평론가들의 재평가를 받게 된다.

세 번째 잠적은 동료 존 콜트레인의 죽음에서 충격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67~1970년 인도에서 수양했고,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기도...

Posted by 김수민

어제 집앞 슈퍼 마켓에 갔다가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대화를 들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구만." 이어서 그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곧 비가 오겠어." 

그분들 말씀처럼 세상은 극에 이르면 꺾입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특히 우리가 다들 좋아하는 돈! '돈'은 이름 그대로 돌아야 제맛이죠.
경제학자 홍기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돈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길을 찾아서 보내주는 것이다.
돈을 쟁여놓으면 사람도 돈도 망가진다." 

사람이 만든 돈도 돌아야 제맛인데, 사람을 만드는 환경은 어떻겠어요?
요즘 덥고 습하시죠? 그렇다고 에어콘 따위로 여름을 춥게 만들면 이렇게 됩니다. 겨울도 여름처럼, 여름은 더 여름처럼.
사시사철이 여름 같다면 지구는 도대체 무슨 맛으로 돌까요?

사람이 여름에 할 일은요 열받고 땀흘리는 겁니다. 다가올 겨울의 난방에너지로, 이번 여름에 받아둔 열을 강추합니다.




<돌고 돌고 돌고> - 전인권
<입술이 달빛> -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JP의 몽니 재즈 - 소니 롤린스 편
<Dig>
<St. Tomas>
<The Bridge>

<슈퍼스타> - 이한철

[독방 만평] 누가 학습부진일까?




<High Society> - High Contrast
<Lawns> - Carla Bley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 서태지와 아이들

[남의 방송 사연 뽀리기] 오늘은 <보고 싶은 밤 손정은입니다>를 털었습니다.
http://www.imbc.com/broad/radio/fm/night/daily/1715345_29533.html

사실... 7월 10일은 DJ숨인씨의 생일이기도 합니당;;;;

<감사> - 김동률

<Wasted Time> - Skid Row
<Birthday> - Blur
 

Posted by 김수민
이전버튼 1 ··· 4 5 6 7 8 9 10 이전버튼